연혁
베스파뇰라력
(오르페시아) |
주요사건 |
상세 |
3636
(1489) |
베스파뇰라&타르가
불가침 조약 |
타르가의 지원을 받던 도시 국가 나스르가 베스파뇰라에 의해 멸망. 나스르 왕국의 오르페시아 대륙에서 타르가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결국, 베스파뇰라 - 타르가 양 국가는 휴전. 더 이상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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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9
(1492) |
베스파뇰라 -
산초 4세 즉위 |
베스파뇰라 국왕 펠리페 2세가 낙마 사고로 서거했다. 그러나 왕자가 너무 어린 관계로 왕위는 선왕의 동생이 차지하여 산초4세로 즉위했다.
선왕의 왕자는 펠리페의 이름을 잇고 대공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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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1
(1494) |
오르페시아 - 오포루토&베스파뇰라 합병 |
오포루토의 국운을 걸고 진행한 신대륙 개발은 처음엔 사뭇 순조로웠다.
신대륙에서만 나는 특이한 광물들과 질 좋은 석재, 아직 누구도 손댄 적 없는 금은광산이 오포루토를 열광케 했다.
그러나, 신대륙의 산물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산업인프라를 세워야 했고 그를 위해 오포루토는 무리한 국채 발행을 시작했다.
또한, 신대륙 러쉬에 몰린 사람들로 신대륙에만 비이상적일 정도로 국력이 집중되었고
(한 때, 오포루토의 성인 남자 중 9할이 선원이나 신대륙 개발에 종사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로 인해 본국 1차 산업의 기반이 흔들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신대륙의 개발만 완료되면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 믿었지만 애석하게도 개발의 결실이 나오기도 전에 오포루토라는 국가의 근간이 흔들려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신대륙과 오포루토의 해양 자산에 눈독을 들이던 베스파뇰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포루토의 국채 탕감을 조건으로 제안된 합병은 두 왕가의 결혼이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베스파뇰라 왕 산초4세와 오포루토 여왕 트리에스테는 미혼이거나 배우자와 사별하고 있었다.
특히 다행이었던 것은 오포루토와 베스파뇰라가 시조를 같이하던 국가였다는 것이었다.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같은 시조에서 갈라져 나왔고 문화 기반이 같은 두 나라는 비교적 평화적으로 한 나라로 융화될 수 있었다.
신 베스파뇰라의 등장은 오르페시아의 세력 균형에 일대 변혁을 예고했다.
구 오포루토 계 이민자의 반발을 막기 위해, 베스파뇰라는 '페루초 에스파다'를 신대륙 총독으로 임명. 베스파뇰라에서도 새로운 기회를 찾아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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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2
(1495) |
베스파뇰라 -
코임브라항 1차 완공 |
포르토 벨로를 대신할 코임브라항이 1차 완공되어 구대륙과 신대륙을 이어주는 새로운 관문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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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4
(1497) |
에스페란자 공주 탄생 |
베스파뇰라와 오포루토 합병의 결실로 에스페란자 공주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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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파뇰라 -
리볼도외 건설 |
신대륙 중부 개척의 본거지로 리볼도외 건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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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5
(1498) |
베스파뇰라 -
페루초 삼거리 건설 |
리볼도외와 코임브라를 잇기 위해 페루초 삼거리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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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파뇰라 - 페루초 귀국과
스트라타비스타의
접근 |
신대륙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한 총독 페루초는 본국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기 위해 잠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또한 비밀리에 얻은 딸의 양육을 도와줄 사람도 필요했다. 그는 본가의 하인들을 모두 해고했으나 충실하고 입이 무거운 젊은 하녀, 레오노라만은 딸의 양육을 위해 남겨 두었다.
이후 그의 딸은 레오노라의 보살핌하에 자라나게 된다.
한편 베스파뇰라의 실력자 펠리페 대공과 스트라타비스타가 그에게 접근해 조직에 몸담을 것을 권유한다.
기회와 위협을 동시에 느낀 페루초는 기꺼이 스트라타비스타와 손을 잡지만 향후 10인귀족으로 일컬어지는 펠리페 대공의 측근 제후의 자리를 받는 것은 거절한다.
그는 이후의 고대 문명 탐사과정에서 이미 스트라타비스타가 갖고 있던 지식과 막대한 자금력, 조직의 지원을 받는다.
이때부터 부관 질베르토 그라나도는 페루초에게 뭔가 비밀이 생겼음을 눈치채고 의심을 키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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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6
(1499) |
베스파뇰라 -
페루초와 노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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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아는 베스파뇰라 대상인의 딸로 어린 시절부터 사람을 부리는 데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그런 그녀가 사랑에 빠져 들게 된 것은 왕실 주최의 연회에서 대모험가이자 신대륙공인 페루초를 만났을 때였다.
그녀는 희끗해지기 시작하는 페루초의 수염과 머리카락, 신대륙공의 이름이 주는 여유와 근엄함에 도저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시 페루초는 비밀리에 신들의 유산을 찾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한 눈에 그녀의 이용가치를 알아본 페루초는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녀는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의 탐사를 후원했다.
하지만 신대륙으로 돌아간 페루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기다림에 지쳐 정보를 캐낸 끝에 그에게 숨겨진 딸과 하녀를 정부로 둔 것 같다는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10대의 설레이는 첫사랑은 단번에 지옥불과도 같은 분노와 증오로 바뀌고, 때마침 접근한 펠리페 대공의 제안을 받아들여 페루초에 대한 복수를 용인하는 대가로 10인귀족의 일원이 되었다.
이때 펠리페의 측근이던 몬토로를 알게 되어 연인이자 오른팔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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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7
(1510) |
베스파뇰라 -
에스페란자 여왕 즉위 |
베스파뇰라 국왕 산초 4세가 사망하고 후계로 유일 비속인 에스페란자 공주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펠리페 대공 일파는 정당한 계승권을 주장하며 극심하게 반발했으나 오포루토 유민의 민심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밀려났다.
에스페란자 여왕 즉위와 동시에 코임브라 2차 항구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 때 신대륙의 마물들이 너무 기승을 부리는 탓에 페루초 삼거리의 건설은 일시 중지되었다.
왕위를 힘으로 빼았겼다고 생각한 펠리페 대공은 언젠가 복수를 다짐하며 힘이 될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한다.
특히 대륙 최고의 마법사인 알폰소 에르난데즈가 자처하여 그의 막하로 들어오고, 스승이 된 에르난데즈의 안배에 따라 후에 10인귀족이라 불린 강력한 제후들을 하나둘씩 포섭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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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0
(1513) |
베스파뇰라 -
몬토로, 남작 작위
수여 |
몬토로는 원래 펠리페 대공 가문의 가신집안 출신이며 그다지 높은 지위를 갖고 있진 않았다.
펠리페의 마음을 잘 맞추어 주었던 탓에 측근으로 발탁되었고, 에르난데즈의 생각과 행동을 어깨너머로 보며 음모를 꾸미고 상황을 조종하는 방법을 배웠다.
페루초에게 배신당한 노비아가 펠리페 대공 일파에 합류하자 마음의 빈자리를 파고 들어가 내연관계를 이루는 것에 성공했다.
사교계에서는 10대후반의 젊은 미남자가 성공을 위해 연상의 마녀에게 몸을 팔았다라는 평가가 다분했으나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에르난데즈는 노비아를 조종하기 위해 그를 이용하고자 했고, 에르난데즈의 추천으로 몬토로는 전격적으로 남작위를 받아 10인귀족의 대열에 합류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모를 즐겨 꾸미는 탓에 '작은 에르난데즈'라는 별명을 얻고 있다.
신대륙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자신이 대륙공 페루초를 뛰어 넘어 신대륙을 차지하고 싶다는 야망이 꿈틀거렸고, 점차 노골적으로 자신의 나라를 갖고자 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한편 노비아를 어릴 때부터 보필하여 10인귀족의 자리에까지 오른 코르테스틑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으며, 에르난데즈는 그것이 몬토로의 보잘 것 없는 배경에 대한 컴플렉스로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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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1
(1514) |
베스파뇰라 -
토르쉐 박사 10인귀족영입 |
일리에의 젊은 천재과학자인 페르난도 토르쉐 박사가 에르난데즈의 설득으로 펠리페 대공의 막하에 합류하여 10인귀족의 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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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6
(1519) |
3년 전쟁 발발 |
합병 이후, 신대륙의 풍부한 물산과 오포루토에 해군력에 힘입어 무서운 기세로 국력을 신장시킨 베스파뇰라.
그리고 오랫동안 오르페시아의 패자로 군림했던 섬나라 브리스티아. 신구 두 세력은 마침내 오르페시아의 패권을 두고 충돌하고 말았다.
노회한 브리스티아 국왕과, 24세의 소녀 여왕 에스페란자의 대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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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7
(1520) |
베스파뇰라&일리에
상호방위조약 체결 |
일리에가 베스파뇰라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브리스티아에 선전포고.
일방적인 브리스티아의 승리를 점치던 오르페시아인들의 예상을 무색케 하고 전황은 백중세로 돌아섰다.
대륙 지식 사회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대마법사 에르난데즈의 교섭력이 빛을 발휘한 순간이었으며, 막후에서 활약한 10인귀족과 펠리페 대공의 명성이 대륙 전체에 크게 떨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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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8
(1521) |
발레아레스 해전과
베스파뇰라의 승리 |
전쟁 내내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우위를 점하던 브리스티아와 힘겨운 항전을 거듭하던 베스파뇰라의 주력함대는 1521년 베스파뇰라 북부의 발레아레스 앞바다에서 양국의 운명을 건 일전을 벌였다.
몇 배의 전력을 보유한 오르페시아 최강의 브리스티아 함대는 상선과 어선을 급히 끌어모은 베스파뇰라 함대와 혈전을 치른 끝에 양 함대는 서로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
전투의 결과만 놓고 보면 무승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브리스티아가 잃은 전력이 훨씬 컸던 데다가 브리스티아의 본토를 방위하는 육군 전력은 해군에 비해 크게 못 미치는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브리스티아는 최고의 갑옷를 잃고 무장해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전투에서 토르쉐 박사가 개발한 대량살상 무기가 다수 선 보였으며, 브리스티아의 생존자들은 오타이트라는 물질의 힘을 이용한 기술과 비인도적인 생물병기의 실전사용이 자행되었다고 주장했으나 전쟁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묻혀졌다.
브리스티아는 자랑하던 무적 함대를 모두 잃은 후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베스파뇰라는 발레아레스 해전 이후, 일리에와 타르가를 끌어들여 브리스티아를 고립시킨 후 막강한 육상 전력을 동원해 브리스티아에 상륙, 본격적인 본토 공략에 들어갔고 며칠만에 수도를 함락당한 브리스티아 왕실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전쟁에 승리한 베스파뇰라는 브리스티아의 잠재력을 두려워해 잔혹한 탄압 정책을 잇달아 펼쳤다.
브리스티아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렸고 국가 재건의 중추가 될 수 있는 브리스티아의 엘리트들을 학살, 거기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해상 봉쇄를 풀지 않았다.
고립된 브리스티아는 삼류 국가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무자비한 패권주의 정책으로 브리스티아의 척추를 꺾은 베스파뇰라는 명실상부한 오르페시아의 패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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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스티아
지식인 대숙청 |
3년전쟁에서 승리한 베스파뇰라는 브리스티아의 경쟁력을 말살하기 위해 지식인들을 대대적으로 잡아 가두었다.
저명한 생물학자였던 모스테인 박사 역시 사소한 죄목으로 잡혀와 먼 신대륙의 자캥 감옥에 수용되었으며 그곳에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던가 아니면 연구에 협력하라는 선택을 강요당했다.
죽기 싫었던 그는 몬토로가 주도한 실험에 협력했지만, 마지막에 효용가치가 사라지자 그 역시 실험체가 되어 강제로 언데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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